오늘은 우리나라의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조선왕조 제4대 왕인

세종대왕은,


1397년 4월 10일 출생,

1450년 2월 17일(음력) 

승하하셨으며,


재위기간은

1418년 8월 ~ 1450년 2월입니다.


본명은 이도(李祹)이며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장헌(憲)입니다.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는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소헌왕후 입니다. 


1408년(태종8년) 충녕군에 봉해졌고,

1413년(태종13년)에 대군이 되었고,

1418년(태종 19년)에 왕세자에 책봉,

같은 해 8월,

태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 받아

 22세의 나이로 즉위 하였습니다.


세종은 6명의 부인과

18남 4녀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

소헌왕후 심씨에게서

5대 왕인 문종,

수양대군(세조 제7대),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정소공주, 정의공주


영빈 강씨에게서

화의군


신빈 김씨에게서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

익현군, 영해군, 담앙군


혜빈 양씨에게서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


숙원 이씨에게서

정안옹주


상침 송씨에게서

정현옹주


-----


가계도가 어마어마하네요.

세종대왕의 일화 중에는

아내 소헌왕후가 임신을 하자

경복궁에 '건순각'이라는 

분만실을 선물하기도 했다죠.


'건순각'은 

건강하게 순산하길 바란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 제도정비 ·유교정치 


세종은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 운영을 위해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하고


황희, 맹사서으 허조 등을 등용,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였습니다.


그리고

6조 직계제를 유지하며

국정을 직접관장하다,

 

1436년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해

의정부의 의결 기능을 부활 시키고

의정부와 6조의 관계를 정비하였습니다.


또한 집현전을 확장하여

젊은 학자들을 등용,

인재양성과 학문진흥에 힘쓰셨습니다.


이들을 통해

정치 자문, 왕실 교육, 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셨구요. 


 

 ▣ 한글창제 


세종은

1443년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의 

협력을 받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3년간의 검증 기간을 거쳐

1446년에 반포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백성들도 

어려운 한자를 몰라도

쉽게 이해하고 

뜻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입의 구조와 발성 원리를 연구,

자금과 모음을 서로 교합하여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는

새로운 표기법을 창제하신거죠.


덕분에

우리는가 지금도 전세계가 

인정하는 과학적인 문자를

보유하게 된 것입니다.




 ▣ 음악과 과학기술의 발달 


세종은

음악에도 관심을 두어


1425년 관습도감을 설치하고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

하는 등 장려하였습니다.


세종은 

현재 무형문화재 1호인

 [정대업, 보태평]을

직접 작곡하기도 하였죠.


또한 천문 역법 기상에도

큰 관심을 가져


외국보다 200년이나 앞서

측우기를 제작하고,


궁중 내에 과학관인

흠경각을 설치 과학기구를 비치하였으며,


천체 관측기구 

해시계(양부일구), 물시계(자격루)

등을 발명 제작하게 하였습니다.



 ▣ 세종의 대외정책 


세종은

주변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영토확장에 진력하였습니다.


명나라에 보내던 

금,은의 조공물을 폐지하고

말과 베로 대신하도록 하였습니다.


여진과의 관계는

무력으로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전 양면책을 썼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로 하여금 구축하고

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 이천 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고

4군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때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곳에 백성들을 옮겨 살게하는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을 썼습니다.



 ▣ 세종에 대한 평가 


세종은

정치, 경제, 국방, 문화 등

여러가지 부문에서

우수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건국 초기의

강압적 왕권과 훈신세력 등이 사라지고,

온유한 유가적 자질의 신권과

유자적 소양을 지닌 국왕의 만남으로

유교정치를 펼쳤습니다. 


그 밖에

단군사당 봉사,

삼국의 시조묘에 제사 등


민족의 역사와 그 뿌리를

소중히 하는 데까지 

관심을 두었습니다. 


당시 사대주의가 팽배한

시대배경을 갖고 있었으나,


외국 문화를 참조하면서도

민족문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전력하여


민족 역사상 

가장 찬란한 한 시대를 열었습니다.



 ▣ 세종에 대한 일화 


(1)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도(세종)는 성질이 고약해

형제들 사이에서 무시를 당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어린 시절

당시 세자인 양녕대군의 자리를 

위협한다는 의심을 받으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역사학자들은

세종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틈만 나면 짜증을 내고

성을 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

세종이 열일곱 살이 되던 해

태종은 세종에게 

여러 악기를 하사하며,

"너는 세자가 아니어서

따로 할 일이 없으니,

편안히 즐기기나 하여라"

하셨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세종대왕은

거문고와 가야금에 몰입하여

다른 형들을 가르쳐 줄 수준까지

이르렀고,


실록에 따르면

사이가 틀어졌던 세종대왕과 양녕대군이

다시 화합하는 계기가

악기를 서로 가르치고 

배우면서였다고 합니다.


(3)

세종대왕은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고통을 함께 하고자 했습니다.


경회루 동쪽에

백성들의 집과 같은 초가집을 지어

2년간 검소한 생활을 했는데,


이를 염려한 신하들이

몰래 초가집 바닥에 짚더미를

넣어두었는데


세종이 이를 알고

매우 크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4)

세종대왕은


궁에서 일하는 

노비 여성이 임신을 하면


출산 전에는

한 달의 휴가를 부여해

만삭의 몸으로 일하지 않도록

조치를 하였고,


출산 후에는

100일의 출산휴가를 주었습니다. 

 

남자 노비들 또한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30일간의 휴가를 주어

아이를 돌보도록 하였구요.


요즘 세상에서도

잘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출산휴가 제도를 

실천하신 거네요.



올해는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57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말의 소중함을 되새겨 보며,

감사한 마음을 가져봄이 어떨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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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출생과 업적"  (0) 2018.02.13

이순신 李舜臣 (1545 ~ 1598)



 이순신 장군의 출생 


이순신 장군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입니다.


1545년 4월 28일

한성부 건청동(지금의 서울 인현동)에서

이정과 초계변씨와의 

세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2번의 결혼으로

5남 3녀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연보 


1545 인종원년

 서울 건천동 출생


1576 선조 9년(32세)

 무과, 병과 합격,

함경도 동구 비보권관(종9품)


1579 선조 12년(35세)

훈련원 봉사(종8품)


1580 선조 13년(36세)

발포수군만호


1583 선조 16년(39세)

10월 - 건원보 권관

11월 - 훈련원 참군


1586 선조 19년(42세)

사복시 주부(종6품)


1589 선조 22년(45세)

정읍 현감


1592 선조 25년(48세)

3월 - 거북선 진수

4월 - 임진왜란 발발

5월 -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에서

왜선 54척 격파

6월 -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해전에서

왜선 90척 격파

7월 - 견내랑, 안골포 해전에서

왜선 60척 격파

9월 - 부산포 해전에서

왜선 135척 


1593 선조 26년(49세)

8월 - 삼도 수군통제사


1594 선조 27년(50세)

3월 - 당항포 해전에서

왜선 31척 격파


1597 선조 30년(53세)

3월 - 원균의 모함과 당쟁으로

투옥 후 백의종군

9월 - 명량해전에서 12척으로

왜선 133척과 싸워 31척 격파


1598 선조 31년(54세)

노량해전에서 적선 200척 격파 후

총탄에 맞아 전사


1643 인조 21년

전사 45년 후

"충무"의 시호를 받음



 임진왜란 주요해전 


옥포해전 (1592. 05. 07)

아군 91척, 적군 50여척

적선 26척 격침, 아군 피해 무


최초의 해전이며,

무저항의 안심속에 기습공격을 진두지휘하여

첫 승리를 거둠.



사천해전 (1592. 05. 29)

아군 26척, 적군 13척

적선 13척 격침, 아군 피해 무


지형과 조수를 이용한 

유인작전 실시.


개인적인 공훈보다는 

전체적인 성공을 독려



당포해전 (1592. 06. 02)

아군 26척, 적군 21척

적선 21척 격침, 아군 피해 무


적정과 지형 관찰을 통한

 정보획득.


경계의 원칙실용

> 탐망선 외양 배치로 기습 대비

> 거북선을 선두로 공격개시


화력 집중의 원칙실용

> 거북선으로 적 기함인 누각대선에

 화력 집중 공격




당항포 1차해전 (1592. 06. 05)

아군 51척, 적군 26척

적선 26척 격침, 아군 피해 무


전선 3척으로 포구 내 지형 정찰

전선 4척을 도주 왜선 격멸과

왜군 지원 함선 대비 복병으로 배치


주민보호 및 왜군 육상 도피 

방지를 위한 후퇴 및 함대를

좌우 분산 이동 후 협격하여 섬멸



한산해전 (1592. 07. 08)

아군 56척, 적군 73척

적선 47척 격침, 12척 나포


양측 전력 대부분이 투입된 대해전.

지형을 고려하여 판옥선으로 유인,

전술적 후퇴 후


적전에서 대선회하여,

학익진 편성 공격.


적 주력선 공격으로

명령계통 혼란 초래.



안골포해전 (1592. 07. 10)

아군 91척, 적군 42척

적선 42척 격침, 아군 피해 무


모든 화력을 왜군 기함인

총각선에 집중.


지리적으로 불리한 여건이었으나

작전 지휘의 승리.



부산포해전 (1592. 09. 01)

아군 166척, 적군 470척

적선 128척 격침, 아군 피해 무


왜선 집결지인 부산포 공격을 위해

고된 훈련 후 야간 이동을 실시.


장사진(종렬진)을 편성하여

전선 격파를 위한 치열한 장기 포화전.



칠천량해전 (1596. 07. ~ 10.)

아군 삼도수군 268척 

조선 수군 거의 궤멸


7년의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패를 당한 해전.


원균의 음주 태만으로 

배설의 안전구역 이동 건의를 무시.


이억기 등 지휘관 및 대부분의 군사 전사.

전선 12척만 탈출. 원균 사망



명량해전 (1597. 09. ~ 10.)

아군 12척, 적군 330여척

적선 31척 격침


일자진(횡열진) 편성 공격.

주변 해역의 지형 및 

시간대별 조류 변동을 고려하여

출전 시간을 조정.


죽음을 불사한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정유재란의 전환점 마련.



노량해전 (1598. 11. 18 ~ 19)

아군 83척(명나라 63척 포함), 적군 200여척

적선 200여척 격침, 이순신 장군 전사


전 함대를 좌우로 나누고 

주위 섬에 복병 배치 후

야간 기습공격.


퇴로가 차단된 왜선들의

최후 발악으로 근접전의 일대 혼전.




 이순신 장군의 주요작품 


난중일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7년동안 전쟁터에서

직접 작성 한 것으로,


충무공의 성품이나

국정에 대한 솔직한 심정,

군사에 대한 비밀계책,

친지/부하 등과 내왕한 내용,

부하들에 대한 상벌 등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임진왜란 당시

정치, 군사에 대한 파악과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

되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언 


물령망동 정중여산

(勿令妄動 靜重如山)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1592년 5월 7일

임진왜란 중 처음으로 출전한

옥포해전을 앞두고,


경상좌우도 수군과 육군의

패배 소식으로 긴장하고 당황한

군사들에게 


공격에 대한 세부사항을 지시 후

공포심과 전쟁겸험 부족을

극복하고 전장에서의 여유와

냉철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신 말씀입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生 必生)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왜선 133척을 전선 12척으로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절대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장수들의 전투의지 분발과

결사구국의 각오를 

나타낸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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